마음의 쉼터

[스크랩] 되돌아 가기

대영플랜트 2010. 3. 28. 19:32

내가 시골에 살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병원 다니는 행태와 쇼핑 패턴이다.

이름 난 명의가 시골까지 와서 봉사할 리는 만무라 웬만한 것은 몸으로 떼우고,

폼 낼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기능만 탁월하면 그것으로 땡이다.

시내 마트까지 가자니 오가는 데 반나절, 기름값도 만원쯤 든다.

이리저리 따져보면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게 경제적이다.

 

내 통밥이나 전문의의 소견이나 똑같은 잔 병은 비치된 상비약으로 내 스스로 조제해 지나가고,

뜻하지 않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사린다.

지나가는 뱀은 피해다니고, 현관 문을 열기 전 말벌의 존재부터 살핀다.

이 하잘것 없는 생물들의 눈치부터 살피는 내가 처량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며 애써 위로 한다.

 

겨울이 좋은 것은 이 위험한 것들이 불쑥 나타날 염려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골의 겨울은 심리적으로도 한가하다.

 

<내린 눈이 곱기도 하다>

 

이런 때 심심풀이로는 라디오만한 것이 없다.

TV처럼 몸을 곧추 세우고 응시해야 하는 고통이 없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눈을 지긋이 감고 듣다 스르르 잠들 수 있어 좋다.

손가락 꼼지락 거릴 필요도 없이 진행자들이 들려주는 음악과 수다를 들으며

옛 추억을 생각해 내거나 새로운 상상을 덧붙여 혼자 여유로울 수도 있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던가.

눈으로 얼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만큼 내 안에 있던 그리움도 죽은 듯하다.

목소리 속 서정에 애정을 두던 습관도 사라진 듯하다.

문득 그런 서정이 그리워진 것일까?

시대를 거슬러 라디오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밭에서 일할 때 라디오를 켜 두면

제법 인적이 있는 마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밭에 나가면 비닐하우스내 라디오부터 켜는데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컬투쇼다.

점심 후 나른해지려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미친듯 내뱉는 진행자들의 입담에 졸음이 들어설 틈도 없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껄이는 대로 낄낄대기만 하면 되는

이 단순한 프로그램에 자꾸만 끌린다.

새겨 들을 말은 "웃으며 삽시다" 단 한 마디 뿐이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어쨌든 똑같은 세상,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자는 뜻일 게다.

듣다 보니 중독되는지 라디오는 밭에만 있으므로

어떤 날은 그 방송을 듣기 위해 일부러 밭에 나갈 때도 있다.

 

밭에 나가지 않는 요즘,

나 없는 사이에 지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누며 낄낄댈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음 날 이야기에 내가 뒤쳐질까 걱정되기도 한다.

9시 뉴스 외엔 볼 프로그램도 없어 밤은 또 적막이다.

라디오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 며칠간 쭈욱 했다.

아버지가 듣는 라디오가 2대나 되는데 하나 빌려달라 할까 하다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함에 또 며칠간 고민을 했다.

하나는 탁상용이고, 하나는 산책할 때 호주머니에 갖고 다니는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

용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 달라 하기도 그렇다.

쫀쫀하게도 마지 못해 그러라 하는 모습도 보기 그렇다.

몇 푼에 안 되는 소품 때문에 부자지간을 긴장으로 서먹해지게 하고 싶지도 않다.

 

별 수 없이 하나 구입하기로 하고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인다.

처음 3-4만원 짜리로 보던 것에서 기능을 조금씩 상향시키니 어느 새 15만원대로 왔다.

가격 앞에서는 성능이건 디자인이건 주저 없이 포기된다.

여기서 더 상향시키면 살림살이 거덜나니 욕심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큰 맘 먹고 하나 쏘기로 했다.

맘 먹기가 힘들지 일단 정하고 나면 일사천리다.ㅋㅋ

 

실물을 보지 않고 사진과 설명만으로 구입하는 데는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사진빨에 혹한 경우도 있어 나름 구매후기를 꼼꼼히 살펴 구입하는데

사람의 취향과 느낌도 천차만별이라 남들이 좋다한 것도 내겐 아닌 것도 있고,

악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기엔 좋은 것이 있어

구매후기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도 아니다.

            

구매 결정후 송금을 할 땐 그런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16만 1천원에 구입하기로 하고 덮어뒀다 다음 날 다시 검색해 봤더니

똑같은 제품을 더 낮은 가격에 파는 곳이 있다.

나는 여태 옥션이 제일 싼 곳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참에 11번가에도 가입하고, G마켓, 인터파크에도 가입했다.

어딘가 소속된 곳이 많아진다는 것이 촌놈들에겐 또 다른 성취감이다. ^^*

 

14만4천원.

하루 더 미룬 덕에 2만원 가량 더 싸게 구입하게 되니

돈을 쓰면서도 번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신정 연휴에 이은 폭설 때문에 아직 물품을 받아보진 못했지만 

음질 음량 빵빵한 오디오에 공 돈이 딸려 들어온 것처럼 행복하다.

 

 

조급히 생각하고 성급하게 결정해서 좋은 일은 별로 없다.

시간도 천천히 지나갔으면 좋겠고, 하루도 천천히 한 해도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매년 연말이면 쫑파티를 하고, 12월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거리에 모여 새해가 밝기를 카운트 다운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부럽다.

새해가 됐다손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나도 지난 해 새로운 꿈을 꾸며 열심히 궁리하며 준비했지만

한 해를 그렇게 의미없이 보내고 말았다.

기대한 것이 많으면 허탈한 법이다. 

희망도 계획도 없는 길을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기 보단,

오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게 차라리 덜 불행해지는 길이다.

 

<일 삼아 쌓았을까, 쌓다 보니 이리 됐을까?>

 

새로 할 것이 없는 사람은 조금씩, 천천히, 오래오래~.

그것이 내가 가진 한도에서 있는 행복을 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빨리 얻어 빨리 느끼고 빨리 끝내는 것이 얼마나 허전한 것인지는

아저씨 아줌마가 되고 나면 몸으로 느끼고 다 안다.

 

제 꼴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굳이 천천히 살려 하지 않아도 그리 되는 것인데

그리 사는 것을 일부러 배우러 다니기도 하나 보다.

내 사는 곳이 명색 슬로우 시티인데도 막상 다니다 보면 어디를 말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제 면사무소 앞을 지나다 확실히 알게 됐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연말께 새 면장이 부임했다.

면 전체 인구가 4천명에 불과해 장날이 아니면 인적이 드믄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주민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싶어 홍보판을 붙여 놨으리라.

혹 빠진 가구주가 서운해 할새라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가가호호 그림으로 죄다 그려 놔 찾기도 쉽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곳을 혹여 다리 아플세라,

아니면 한 방에 다 해결하려는 성질 급한 사람들을 위해 자전거도 무료로 빌려준단다.

내가 기대한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어쩌다 한 사람씩 지나간 듯 만 듯 왔다가 가는 곳이 슬로우 시티련만

몰려온 사람들이 걸게 그림을 코팅까지 해가며 돌담길에 긴 줄로 엮어

그 경계를 다시 확실히 표시를 해 뒀다. 

 

 

오늘이 지나면 모두가 없어지는 것을 기념하고 싶었을까?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내가 간 곳에 자부심을 느끼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와 확인하려 하는 것인지,

모처럼 산책 나온 애완견이 가는 곳마다 오줌을 흘리듯

담벼락에 맹세의 표식을 해 두고 간다.

나도 저리 흘리고 다녔을까? 

 

 

 

 

 

출처 : 하얀미소가 머무는 곳
글쓴이 : 한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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