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5월 20일(일) 22:10 | 서은하 기자 sarah@newsmission.com |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한창 관심을 끌고 있는 <밀양>이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에 쏠렸다. 하나는 전도연의 열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시각’에 대한 것이다.
직접 영화를 관람한 후에 드는 생각은 연기로만 보자면 전도연보다 송강호에게 더 시선이 갔다는 것이고, 이창동 감독의 말마따나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이 영화의 표면일 뿐이다. <밀양>의 밀도 높은 스토리와 주제는 눈에 띄는 자극 없이도 충분히 관객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반응이 나오는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얘기로, 삶과 고통에 대한 얘기로, 구원에 대한 얘기로….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읽든 영화는 결국 ‘그 여자, 신애’에게로 귀결된다. 고통을 회피하거나 빨리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보통 인간의 모습을 지닌 그녀의 얘기 말이다.
그 여자, 밀양으로 도망치다
<밀양>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비추며 시작한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 신애는 이제 막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참이다. 그녀는 아무 연고도 없지만 그저 남편이 입버릇처럼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한 이유로 밀양을 선택한 것이다. 피아노학원을 차린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 준이 있을 뿐이다.
영화 전반부는 신애의 ‘밀양 정착기’에 할애된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왜 밀양이어야만 했는가’는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밀양에 오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철저한 이방인으로 그녀의 생활을 ‘구경’하게 된다. 그녀의 삶은 특별할 것이라곤 없다. 물론 밀양에 온 첫 날부터 도움을 받은 종찬이라는 존재의 은근한 구애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전적으로 종찬의 입장일 뿐이다. 그녀는 의연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울서 내려 온 남동생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유지하고 싶은 평온한 삶의 가면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죽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여생을 보내기로 선택한 ‘밀양’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외도’를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조차 거부한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약간의 허위나 허세도 부린다. 우리 중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모습이지만, 그 작은 허세가 큰 비극의 원인이 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남편을 잃고 너무도 흔연하게 살아가려는 신애의 태도는 처음부터 너무도 어색했다. 그녀가 고통을 겪고, 그로부터 회복되기도 전에 도망치듯 고통의 장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밀양’이라는 장소 자체가 모든 아픔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담보해 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밀양’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없었다. 사실 남편이 살고 싶다고 말한 곳이 필리핀이었다면 그녀는 그곳을 선택했으리라. 아니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남편이 한두 번 언급한 그 곳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다.
서울에서도 행복하지 않았던 여자, 신애. 비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서둘러 고통과 상실로부터 도망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다. 믿었던 ‘밀양’은 그녀에게 비수가 돼 돌아온다.
그 여자, 교회로 도망치다
이처럼 신애가 새로운 파라다이스로 점찍은 밀양은 종찬의 말처럼 ‘다른 데와 똑같은 동네’일 뿐이다. 따라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고통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처럼 잔인하게도 그녀 앞에 더욱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를, 그것도 유괴로 잃는 고통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그저 무너져내리는 대신 도피처를 찾는 걸 택한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가슴이 콱 막혀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으면서도 울부짖고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그녀가 도망간 곳은 ‘교회’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건 물론 보이는 것도 믿지 않는다’던 그녀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자마자 그녀는 “연애하는 것처럼 요즘 너무 행복하다”며 “이제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는 걸 알겠다”고 방실방실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엄청난 비극을 겪은 그녀의 ‘급방긋’은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해도 도무지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교인이 보기에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지만 깊은 상처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쉽게, 말끔하게 해결되는 것인가. 여전히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과 그럼에도 발생하는 인생의 고통을 이해해 보려고 오늘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형편인데 말이다.
급히 먹은 떡이 체하는 법이다. 그래서 신애는 뜻하지 않은 복병 앞에 무너져 내린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다. 이전에 교회와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마음의 평안과 용서’에 매달리던 열기가 고스란히 증오와 원망으로 바뀐다.
이제 그녀의 주적은 유괴범이 아니라 ‘신’이 된다. 이번에 벌어진 사건에 그동안 자신이 겪은 비극도 더해져 증오심은 폭발 지경에 이른다. 분노로 인한 상처가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그녀는 행복하다. 더 이상 고분고분 ‘신의 뜻’에 따르는 대신 확실하게 파괴되는 것으로 복수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그녀는 부정을 저지르면서 섬뜩하게 웃는다. “잘 보이느냐”며. 목사의 설교 중에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기도 한다. 급기야 사과를 깎던 칼로 손목을 난자한다. 다 한 가지 이유, ‘나를 이런 운명에 빠뜨린 당신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겠어’라는 복수심에서다.
그 여자, 왜 그에게로 도망치지 않는가
신애가 드러내는 절망과 좌절감은 누구나 한 번쯤 말하는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내가 그 피해자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인간 본성의 소리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용실을 나서며 종찬에게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나를 여기에 데려온 거에요”라고 하는 대사는 그녀가 오래동안 참아왔던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비극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할 순 없다. 또한 누구나 그로 인한 고통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거다. 인간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어떤 식으로든 회피할 수 있는 곳까지 도망간다. 나약한 인간의 실존이 그런 것일 뿐, 누구도 자신은 예외라고 자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애도 열심히 도망다녔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비록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나서 그렇지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신애의 경우 특이한 것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우회로를 택했다는 것이다.
<밀양>을 멜로영화라고 선뜻 말하기 힘든 이유가 이것이다. 단지 종찬의 사랑이 일방적이어서가 아니다. 짝사랑의 애틋함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짝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 관계는 2차원 면에서의 평행선이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의 꼬인 관계같은 거다. 만나지 않지만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평행선과 달리 꼬인 관계에 있는 직선은 정말 제각각이니 말이다.
따라서 보통 영화라면 종찬의 지극한 사랑에 신애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법도 하건만, 이 영화의 종찬은 그런 지위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그는 신애의 촉수가 닿지 않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의문이다. 왜 신애는 그런 종찬의 어깨에 기대는 간단한 해법을 택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와 씨름하는 편을 택한 걸까. 대신 그녀는 종찬을 다른 식으로 대한다. 좀처럼 사회적 가면을 벗지 않는 신애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대상이 종찬인 것이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에게 손을 뻗지 않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는 처음처럼 볕이 좋은 날,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를 뒤로 하고 끝난다. 그 앞에는 여전히 종찬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거나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그녀는 똘똘 뭉친 증오심으로 썩어가거나,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고통의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끝이 있음을. 영화에서 보여진 그녀의 삶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기서 희망을 보든 절망을 보든, 그것이 바로 ‘나의 시각’이라는 것도 말이다.
직접 영화를 관람한 후에 드는 생각은 연기로만 보자면 전도연보다 송강호에게 더 시선이 갔다는 것이고, 이창동 감독의 말마따나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이 영화의 표면일 뿐이다. <밀양>의 밀도 높은 스토리와 주제는 눈에 띄는 자극 없이도 충분히 관객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반응이 나오는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정말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얘기로, 삶과 고통에 대한 얘기로, 구원에 대한 얘기로….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읽든 영화는 결국 ‘그 여자, 신애’에게로 귀결된다. 고통을 회피하거나 빨리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보통 인간의 모습을 지닌 그녀의 얘기 말이다.
그 여자, 밀양으로 도망치다
<밀양>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비추며 시작한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 신애는 이제 막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참이다. 그녀는 아무 연고도 없지만 그저 남편이 입버릇처럼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한 이유로 밀양을 선택한 것이다. 피아노학원을 차린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 준이 있을 뿐이다.
영화 전반부는 신애의 ‘밀양 정착기’에 할애된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왜 밀양이어야만 했는가’는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밀양에 오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철저한 이방인으로 그녀의 생활을 ‘구경’하게 된다. 그녀의 삶은 특별할 것이라곤 없다. 물론 밀양에 온 첫 날부터 도움을 받은 종찬이라는 존재의 은근한 구애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전적으로 종찬의 입장일 뿐이다. 그녀는 의연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울서 내려 온 남동생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유지하고 싶은 평온한 삶의 가면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죽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여생을 보내기로 선택한 ‘밀양’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외도’를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조차 거부한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약간의 허위나 허세도 부린다. 우리 중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모습이지만, 그 작은 허세가 큰 비극의 원인이 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남편을 잃고 너무도 흔연하게 살아가려는 신애의 태도는 처음부터 너무도 어색했다. 그녀가 고통을 겪고, 그로부터 회복되기도 전에 도망치듯 고통의 장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밀양’이라는 장소 자체가 모든 아픔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담보해 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밀양’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없었다. 사실 남편이 살고 싶다고 말한 곳이 필리핀이었다면 그녀는 그곳을 선택했으리라. 아니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남편이 한두 번 언급한 그 곳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다.
서울에서도 행복하지 않았던 여자, 신애. 비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서둘러 고통과 상실로부터 도망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다. 믿었던 ‘밀양’은 그녀에게 비수가 돼 돌아온다.
그 여자, 교회로 도망치다
이처럼 신애가 새로운 파라다이스로 점찍은 밀양은 종찬의 말처럼 ‘다른 데와 똑같은 동네’일 뿐이다. 따라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고통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처럼 잔인하게도 그녀 앞에 더욱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를, 그것도 유괴로 잃는 고통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그저 무너져내리는 대신 도피처를 찾는 걸 택한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가슴이 콱 막혀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으면서도 울부짖고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그녀가 도망간 곳은 ‘교회’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건 물론 보이는 것도 믿지 않는다’던 그녀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자마자 그녀는 “연애하는 것처럼 요즘 너무 행복하다”며 “이제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는 걸 알겠다”고 방실방실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엄청난 비극을 겪은 그녀의 ‘급방긋’은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해도 도무지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교인이 보기에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지만 깊은 상처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쉽게, 말끔하게 해결되는 것인가. 여전히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과 그럼에도 발생하는 인생의 고통을 이해해 보려고 오늘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형편인데 말이다.
급히 먹은 떡이 체하는 법이다. 그래서 신애는 뜻하지 않은 복병 앞에 무너져 내린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다. 이전에 교회와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마음의 평안과 용서’에 매달리던 열기가 고스란히 증오와 원망으로 바뀐다.
이제 그녀의 주적은 유괴범이 아니라 ‘신’이 된다. 이번에 벌어진 사건에 그동안 자신이 겪은 비극도 더해져 증오심은 폭발 지경에 이른다. 분노로 인한 상처가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그녀는 행복하다. 더 이상 고분고분 ‘신의 뜻’에 따르는 대신 확실하게 파괴되는 것으로 복수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그녀는 부정을 저지르면서 섬뜩하게 웃는다. “잘 보이느냐”며. 목사의 설교 중에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기도 한다. 급기야 사과를 깎던 칼로 손목을 난자한다. 다 한 가지 이유, ‘나를 이런 운명에 빠뜨린 당신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겠어’라는 복수심에서다.
그 여자, 왜 그에게로 도망치지 않는가
신애가 드러내는 절망과 좌절감은 누구나 한 번쯤 말하는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내가 그 피해자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인간 본성의 소리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용실을 나서며 종찬에게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나를 여기에 데려온 거에요”라고 하는 대사는 그녀가 오래동안 참아왔던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비극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할 순 없다. 또한 누구나 그로 인한 고통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거다. 인간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어떤 식으로든 회피할 수 있는 곳까지 도망간다. 나약한 인간의 실존이 그런 것일 뿐, 누구도 자신은 예외라고 자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애도 열심히 도망다녔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비록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나서 그렇지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신애의 경우 특이한 것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우회로를 택했다는 것이다.
<밀양>을 멜로영화라고 선뜻 말하기 힘든 이유가 이것이다. 단지 종찬의 사랑이 일방적이어서가 아니다. 짝사랑의 애틋함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짝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 관계는 2차원 면에서의 평행선이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의 꼬인 관계같은 거다. 만나지 않지만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평행선과 달리 꼬인 관계에 있는 직선은 정말 제각각이니 말이다.
따라서 보통 영화라면 종찬의 지극한 사랑에 신애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법도 하건만, 이 영화의 종찬은 그런 지위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그는 신애의 촉수가 닿지 않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의문이다. 왜 신애는 그런 종찬의 어깨에 기대는 간단한 해법을 택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와 씨름하는 편을 택한 걸까. 대신 그녀는 종찬을 다른 식으로 대한다. 좀처럼 사회적 가면을 벗지 않는 신애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대상이 종찬인 것이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에게 손을 뻗지 않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는 처음처럼 볕이 좋은 날,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를 뒤로 하고 끝난다. 그 앞에는 여전히 종찬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거나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그녀는 똘똘 뭉친 증오심으로 썩어가거나,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고통의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끝이 있음을. 영화에서 보여진 그녀의 삶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기서 희망을 보든 절망을 보든, 그것이 바로 ‘나의 시각’이라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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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읽기] ‘밀양’, 그 여자의 고통에서 희망을 보다
글쓴이 : sara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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