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난감한 나이였다. 그러나 3년만이라도 평생 그리워 해온 일을 하고 싶었다.
1993년 공주농악에서 새납(태평소)으로 장원한 사람, 사물 놀이패를 따라다니며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새납 불던 사람,
무대 한쪽에 서 있다가 수줍게 웃던 사람,
주연들의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곡 구슬프게 불던 사람,
그가 소리꾼 장사익이다.
노래와 생활 사이에서 장사익은 고통스러웠다. 생활인으로 그는 노래할 수 없었고, 노래할 수 없는 소리꾼으로 그는 슬펐다. 가슴에서는 언제나 어린 귀로 들었던 김관섭의 태평소 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찍은 사진은 대부분 찡그리고 풀죽은 얼굴이다. 노래를 시작한 후 찍은 사진 속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다. 장사익, 그도 몰랐던 표정의 변화였다. "내게 노래는 엄마의 탯줄 같아요. 노래 없이 살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그는 마음에 닿은 시를 찾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흥얼거린다. 호흡에 따라, 또 불현듯 왔다가 사라지는 감정에 충실하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달이 뜨고 별이 질 때까지 읊조린다. 그 속에서 음은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무정형이다. 국악, 재즈, 가요풍, 재즈풍이 구별 없이 섞여 든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노래, '섬' '국밥집에서' '허허바다' '파도' '기침' 등을 들으면 확연해진다. "시를 찾는 일이 노래 만드는 작업의 90%에요. 마음 통하는 시를 찾아 자꾸 읊조리는 동안 저절로 음이 만들어집니다."
장사익은 올해 예순 일곱이다. 서른만 넘어도 '늙은이' 취급받는 한국 연예계에 그는 마흔 여섯, 수염 희끗희끗한 얼굴로 데뷔했다.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 직장생활을 한 후였다. 장사익은 지금이 가장 노래하기 좋은 나이라고 했다. 40대에는 사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고, 50대에는 오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다. 60, 70이 넘으면 지팡이 짚고 그 노인의 노래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