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taph(묘비명) - King Crimson
보도에 따르면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안으로만 삭이는 사람에 비해
조금씩 밖으로 표현하는 사람의 암 발생확률은 50%나 감소된다고 한다.
그만큼 스트레스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인 셈이다.
건강을 위해선 쌓인 스트레스는 받아 놓은 밥상처럼 먹어 치워야만 하는 것이고
숙제처럼 풀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전 화 한 번 낼 것 같지않은 프림 커피처럼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닌
국민배우 안성기씨가 방송에 나와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밝힌 해소법은 너무 의외였고 기발했다. 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혼자 차를 타고 가다가 어둔 터널을 지날 때 큰 소리로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터널의 어둠이 주는 편안함과 차 안이라는 독립된 공간의 자유로움 속에서
그동안 발산하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욕을 하며 풀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국민배우 안성기씨가 차를 타고 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육두문자가 섞인 욕설을 퍼붓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었다.
괜찮은 방법이라 싶어 어쩌다 혼자 차를 타고 갈 때면그 방법을 써 봤는데
나름 괜찮다 싶어 종종 그 방법을 종종 쓰곤 했었다.
그 효과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입증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미운 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욕설을
퍼붓는 건 뒷맛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 방법을 쓸 수 없는 일이 생겼다.
흔히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기도 하고,
욕은커녕 남 앞에서 얼굴 한 번 붉히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끼어드는 상대편 차를 향해 가슴이 서늘해 질 정도의 폭언을 내뱉는 광경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곤 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빨리 빨리에 길들여진 사회 전반에 만연된 조급증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자화상은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는 부끄러움, 그 자체다.
그러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눈이 내린 날 좁은 이면도로를 차를 몰고 갈 때였다.
편도 1차선의 도로 한 편엔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두 대의 차가 동시에 교행 할 수 없는 좁은 도로였다.
마주 오는 차와 만나면 어느 한 편의 운전자가 차를 빈 공간으로
비켜 주어야만 상대편 차가 겨우 지나갈 수가 있었다.
마침 내 쪽에 약간의 빈틈이 있어 차를 비켜 세우고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진 꽤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실제로는 2~3분에 불과할 그 시간이 지루하다 느껴진 것은
심리적 조급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차가 지나가길 기다려 다시 차의 머리를 도로 안쪽으로 들이미는 찰나,
뒤에서 차 한 대가 확 달려 나오는 게 사이드밀러에 비쳤다.
본능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수도 있던 위험한 순간,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
욕을 한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자동차문의 유리가 내려져 있었던 게 문제였다.
좁은 이면도로를 벗어났을 때 조금 전의 그 차가 뒤따라오며 경적을 울렸다.
차를 세웠더니 뒤따라온 운전자가 차 유리를 내리고 말했다.
"아저씨, 왜 욕하십니까?"
서른 중반 즘 되어 보이는 젊은 운전자는 내게 또박또박 따졌다.
"이 사람아, 내가 먼저 길을 비켜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이 뒤에서 튀어나오면 어떡해!
하마터면 사고 날 뻔 했잖아!"
그는 나의 이런 대꾸에도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끼어든 건 제 잘못이니 그 점에 대해선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이 드신 분이 그렇게 마구 욕을 해도 됩니까?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그 운전자는 나를 나무라듯 이렇게 한 마디 하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부끄러움과 모욕감으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차라리 같이 멱살잡이라도 하고 욕설을 주고받았다면 이토록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내려진 차창 유리가 원망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그 무지막지한 욕설이 부끄러웠다.
나 아닌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분노 같은 게 내 안 어디에 쌓여
그 욕설의 싹을 틔웠으리라 생각하니 더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닌 더 좋은
해소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던 날 이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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